그들이 항상 최고점에서 추락하는 이유(Feat. 다람쥐)

글을 쓰는 건 쉬운거 같으면서도
마음 먹기가 정말 힘들다.
(게으른 것도 있다...)
글을 쓰는 시간은 30여분에 불과하지만,
머리속에 맴도는 말들을 정리하는
시간은 30일이나 3개월 이상이 걸린다.
뇌 세포들은 다양한 기억들을 파편 조각으로
인지해 그걸 재조합하고, 합성하는데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증발한다.
그래서 글은 기억의 습작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잘 익은 술을 제 때 마셔야
최고의 맛을 내는 타이밍의 정수다.
난 사람 만나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생각하며
사는 자주적인(?) 캐릭터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만나고 기대할수록
더 많은 상처와 무기력함을 느낀다.
그래서 난 이 말을 좋아한다.
'사랑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사랑받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나혼자사는' 정점에 나를 가두었다.
고기집에 들어가 혼자 고기 2인분에
소주를 까는 게 너무나 거뜬한 사람이 됐다.
그런 삶을 살다가 이번엔 작은 일탈을 해보았다.
부산에 출장 갈일이 있어, 부산에 있는 광팬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온라인이라는 공간, 그것도 익명의 공간에서
맺어진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정말 말도 안되는
선택이었지만, 일탈 마니아로서 새로운 경험을 추구했다.
물론 그 친구가 그동안 보여준 팬심과 너무 많은 선물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도 있었다.
그저 나는 나의 할일을 했음에도 더 받기만을 바라는 사람과 사소한 감정이라도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소한 감정이 쌓이면 사람은 가끔 감동을 받는다.
나도 결국 사람이니 말이다.
수 많은 대화를 하지만 다 말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는 짧은 시간들. 해운대가 한 눈에 보이는 70층 상공에서 남정네 둘은 한 잔하며 인생과 투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새로운 시도는 리스크를 포함하지만,
그 리스크를 뛰어 넘으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그 리스크의 정점을 알지 못한다.
며칠 전 일본 아베 신조 전총리가 피격을 당해
숨진 사건이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블랙스완이다.
당사자도 부인도 자녀도 경호원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본에서의 총 피격 살인.
인생이란 얼마나 불확실한가.
한편으론 얼마나 허무한가.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너무나 와닿는 사건이다.
아베는 67살에 선거 유세 중 사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알고보니 살인범은 정말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총을 겨누었다.
살인범 입장에서는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이었겠지만 살인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난 아베가 문득 불쌍하게 느껴졌다.
(매국노 소리 하기 전에 좀 들어봐라)
난 친일 그런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모든 현상을 인간의 욕망에 대한 거울로 판단한다.
젊은 시절부터 극우파의 심볼로 출세가도를
달리고 일본 최장수 총리까지 했으면
먹고 살기도 충분하겠다. 이제 그만 남은 여생을
가족과 주변인들을 위해 살았다면,
이런 극단적인 일들이 있었을까.
정점에서 내려왔을 때는 조용히 있는 것도
깨달음을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동안 소홀했던 생활이라는 감사함에 귀의해보는 것.
아베는 그걸 택하지 못했다.
그는 욕망의 속도를 조절하지 못했다.
하여 계속 유세하고 권력을 쥐고 싶었다.
그에게는 그게 욕망의 사다리이자
인생의 목표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점에서 내리 꽂는 하강효과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계단을 올라가다 알수 없는 새 한마리를 만나서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는 그 새를 처음 보았다. 검은 새 한 마리 때문에
사다리에서 떨어질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은 없을 것이다.
최근에 성공 가도를 달리던
유명 작곡가이자 사업가 공인 한 분도
한 순간에 나락으로 추락 중이다.
수 많은 곡들을 표절한 것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학창시절부터 좋아하던
일본 시티팝의 거장
타츠로 야마시타(Tatsuro Yamashita) 음악도
고대로 벳겼다는 걸 최근에 알았는데,
정말 붙여넣기 수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아베건 공인이건 그들은
꾸준히 욕망의 사다리를 올라가다가
알 수 없는 정점에서 갑자기 추락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옅음 웃음으로 그 추락을
즐긴다. 연민보다는 비아냥이 대부분이다.
그 비참한 순간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욕망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듯,
인간은 욕망과 환상으로 구동하는 존재.
자존심과 자존감은 살아가는데 중요하다.
좋은 인간 관계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필요하다.
하지만 그 욕망의 끝을 알 수 없어,
작은 크랙이 나를 망가뜨리기 시작할때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자존감은 땅으로 꺼지고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도
한 순간에 존재를 감춘다.
세상은 잔인한 것이다. 자본주의란 더더욱 그런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무교이지만 불교스러운 관념을 좋아한다.
법륜 스님 영상을 가끔보는데 명제가 심플해 이해가 쉽다.
스님은 다람쥐를 참 좋아하시는데,
무슨 욕망과 목표를 이야기 하며 괴로워하는 중생에게는 결국 다람쥐 이야기로 때려준다.
"다람쥐에게 삶에 목표가 있나? 다람쥐는 그냥 사는 거다.
다람쥐가 왔다갔다하면 사람들은 저게 먹이를 옮기느라 바쁘네
어쩌네 하지만 그냥 다람쥐는 왔다갔다하는 것뿐인데,
거기에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는 것뿐이야.
사람도 별반 다르지가 않아. 그냥 사는거야. 별 다른 목표가 필요 없어. 이미 잘 살고 있는거야.
자꾸 욕망하고 목표에 눈이 가리면 삶이 필히 고통스러울수 밖에"
다람쥐는 미물이고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그렇게 단순하게 살기는 어려운 것은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자유의지가 있어
우리는 더 행복한가. 아니면 더 불행해지고 있는가.
먹이만 찾고 주인만 오면 좋아서 꼬리 흔드는
강아지와 숲속을 날아다니며 먹이를 모으는
다람쥐와,
그리고 욕망하고 알 수 없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우리가 우월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우월한 고통을 만들어 사는 것인가.
욕망할수록 복잡해지고 복잡할수록 괴로워진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한 쪽만 취할 수 없다. 허나 우리는 늘 즐거움만 찾다가 괴로움이 따라 오는 걸 알지 못한다.
투자도 이와 비슷하다.
내가 목표로 세우고 그 수익을 이루려 한들
그건 그저 나의 욕망일뿐이다.
수익을 주는건 시장이다.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시장은 그저 흘러간다.
수 많은 욕망의 조각들이 합성된 알 수 없는
욕망의 그래프를 향해.
우린 그걸 정복할 수 없다. 정복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투자자는 가끔 다가온 운과 실력의 교묘한 조화의 순간에 과실을 따 먹고 계속 그 나무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과일이 주렁주렁한 그 과일 나무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 아쉽지만 그 자리를 떠야 한다.
조금 더 베어 먹으려 할 때, 조금만 더 가지려 할 때
어느 순간 천둥번개가 치고
돌풍이 불고 혹은 뱀이나 곤충이 나타나
나를 필히 괴롭게 할 것이다.
욕망의 정점이 어딘지
처음 오르는 산을 얼마나 올라야
그 정상이 나오는지는 알 수가 없다.
힘을 다해 열심히 오르다
숨이 차오르면 산기슭에서 잠깐 쉬고
내려오면 그만이다. 산 능성이를 보고
푸른 공기를 마셨다면 그걸로 그만이다.
나는 살아 있고, 산을 오르는 두 다리가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음을
알면 그만이다. 꼭 그 산 꼭대기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걸 알면 된다.
다람쥐처럼 살며 투자해보라.
그냥 움직이면 움직이는 것.
노력은 하되 기대는 하지 않는 것.
욕망하되 가끔 포기도 하는 것.
없으면 없는데로 사는 것.
있으면 감사하며 사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목적은 대단한 걸 지향하는데 있는게 아니라,
그저 살아서 살아가는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
그것을 알게 되면, 삶의 섭리가 한 점으로 모이며
자신을 파괴하는 우둔한 선택에서 멀어질 것이다.
우리는 한 때 모두 다람쥐였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다람쥐가 될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어떤 한 가지를 지나치게 많이 알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실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욕구에도 명확한 경계선을 정해두어야 한다.
-윌리엄 J. 베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