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소멸의식; 개와 고양이의 기억

흑그루(블랙스완) 2024. 7. 12.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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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도 천국의 개들. photo by 흑조


여름 장마가 한창이다.
비 마니아인 나는 매일 창가에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좋아서 히죽덴다.
그리고 뜨거운 도시의 열기는 낭만을 자연으로 밀어 낸다.
젊음이 판을 치고 늙음은 더 밀려난다.
 
양양의 서퍼비치에서 동물적 시간에 매진하는 젊은이와 용산 고층 빌딩 사이로 덕지덕지 붙은 판자촌에서 오늘도 한끼로 연명하는 독거 노인의 삶.
뭔가 크게 불공평 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매우 공평한 게임이다. 세상은 본디 그렇게 설계됐다.
 
나이가 들면서 더더욱 사라져간다는 감각이 강하게 다가온다.
마치 4B 연필로 다 그려놓은 인물화를 지우개로 조금씩 지워가는 느낌처럼.
죽음을 향해 일제히 달려가는 삶의 초상화는 이미 반쯤 지워진 체로 방치돼 있다.
 
가끔 개와 고양이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그것들 아니 그들에게는 삶의 초점이 없다.
암순응과 명순응에 최적화된 아름다운 조리개만 보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목표의식도 다듬어진 욕망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말한다. 나는 그저 존재하는게 목적일뿐이라고.
 
개와 고양이에게는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까.
어떤 트라우마와 망각의 숲 어디쯤일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아가 되고 거세가 되어
인간에게 최적화된 애완동물이 될 운명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판단하지 못하면서 존재하는 존재.
그들은 존재와 망각이라는 매우 심플한 패턴만 가지고 산다.
그래서 비록 자기들이 선택하지 않은 삶이지만 
억울하지도 혹은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괴랄한 구석이 전혀 없는 태고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그들에게는 적절한 먹이와 곤히 잠들 푹신한 베게와
가끔 주인의 따스한 손길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에 비해 인간의 기억은 다소 교활한 데가 있다.
우리는 상세히 기억하고 때론 편집하며 때론 왜곡하고 가끔 착각까지 하는 고등(?)생명체다.
하여 인간에게 어찌보면 망각은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우리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과 행복한 추억을 다 잊고 살라고 하는 것은 크나 큰 고통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대부분 편집된 장면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집착을 다 잊고 개와 고양이의 기억이 되는 순간 깊이 내재한 존재론적 불안마저 다 떼어낼 수도 있는 지경이 될지 모를 일이다.
 
치매 노인을 보고 슬퍼하는건 정신이 멀쩡한 자들의 감정 놀음이다.
치매 노인은 자신을 보고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무아로 존재하며 소멸해간다.
그 슬픔이 무엇인지 가족이 무엇인지 추억이 무엇인지조차 모두 망각 속으로 사라진 개와 고양이와도 같은 심플한 정신 상태가 된다.
 
소멸한다는 것은 단어 자체 만으로도 인간에게 슬픈 명제다.
죽고 사라지고 없어지고 지워진다는 것은 가장 부정적인 감정이다.
인간은 저장강박증이라는 불치병을 가지고 태어나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한편 그 저장강박증은 중요한 욕망의 트리거가 된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더 많은 자산을 저장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쌓기 위해 때론 죽이고 죽는다.
 
인간만이 저장강박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람쥐도 도토리를 모으고 개미도 먹이를 모은다.
다만 그들은 욕망이 아니라 본능에 의해 어느 임계점에서 멈춘다.
하지만 인간에게 저장강박의 임계점 따위는 존재 하지 않는다. 우린 더 모으고 더 강렬하게 욕망하고 더 화려하게 살아야 하는 저장 강박에 사로 잡혀 평생을 살아간다.
우리가 늘 경쟁하고 시기질투하며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 잡혀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스스로 설정한 높은 기대치와 최적화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 한편으로 기쁜 일이라 생각한다. 가끔은 그게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저장해야하는 강박과 더 이상 기억해야 하는 본능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암 말기 노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어설픈 존재의 연명이 아니라 사진 따위는 찍지 않고 가족과 함께 하는 현재의 시간뿐이다.
 
한 과학자가 이야기 했듯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생동하는 것들은 불안정한 상태.
소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
완전히 죽은 것은 가장 안전한 에너지 준위를 이룬 평형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들은 엔트로피가 제로(0)로 수렴해가는 당연한 물리적 현상에 불과하다.
다만 우리는 그 안에 인간적 감정을 집어 넣고 의미 부여를 할 뿐이다.
 
대학교 시절 매우 친하게 지냈던 한 후배가 있었는데, 말도 잘 통하고 소울메이트처럼 수업도 같이 듣던 사이였다.
그러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돼서 잠깐 연락이 끊긴 적이 있었다.
한 반년쯤 지나서 문득 그 친구가 생각이 나서 연락을 해보았다.
전화를 받지 않길래 아는 지인에게 수소문해 보니 몇개월 전에 계곡에서 물놀이를 갔다가 실족사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먼 타국에서 울컥 눈물이 났다. 장례식에는 가지고 못했고 이미 몇개월전 일이었지만
미안하고 서운한 맘에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소멸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 끝났지만 나의 감정이 그저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인간은 소멸의 시간과 감정을 동기화 하지 못한다.
그는 오래전 죽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슬퍼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소멸의 시간을 측정하지 못하며 감정으로 어설프게 가늠할 뿐이다.
 
우리는 매일 전쟁하듯 하루를 산다.
의미를 위해 존재를 위해 아이를 위해 돈을 위해 어떤 목적을 위해.
하지만 소멸의 시간은 측정하지 못한다.
각자에게 달린 소멸의 모래시계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무언가 저장하기 위해 무언가 더 가지기 위해 결과적으로 정해진 삶의 시간을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 소멸의 시간을 낭비한다.
 
나의 존재가 매순간 소멸한다고 처절하게 느끼면, 나의 선택은 점점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소멸하기 때문에 더 화려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된다. 삶의 정답은 없다.
다만 소멸 앞에 당당한 세속적 욕망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허무한 미사여구가 될 소지가 크다.
 
나이가 들며 인간의 굴레, 인간적 한계, 삶의 허무를 알아갈수록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시야가 넒어진다.
내가 화려하고 영원한 가치들에만 시선이 사로잡혀
하루를 살수록 나는 헛된 시간의 노예로 살아갈 확률이 크다. 나는 상대적으로 소멸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소멸하는 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은 소멸하는 것들과 시간을 아끼며 사는 방법 밖에 없다.
강건하고 영원불멸하는 것들에 집중할수록 소멸하는 자는 더욱 초라해져 갈뿐이다.
 
그런면에서 소멸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저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는 개와 고양이는 의도치않게 인간보다 한 수 위일지도 모른다.

태어남을 선택하지 못한 우연의 산물, 디폴트 값으로 설정된 저장강박증, 소멸의 시간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혹은 쓰임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애닳게 갈구하는 인간은 어찌보면 가장 가여운 존재다.
 
나는 오늘도 사라져간다.
우연히 존재한 지구라는 작은 별에서.
운에 위해 대부분 모든게 좌지우지되는 불공평한
점점 따분해지는 일상에서.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의 허울에서.
 
다시 아무 초점없는 개와 고양이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본다.
그 동그란 눈 속에는 소멸하는 갸냘픈 한 인간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오늘도 사진 한 컷보다 소멸의 기억을 저장하려 애써본다.
 

 하루에 세 번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루를 풍요롭게 살 수 있다
- Marcus Aurel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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