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두메산골 어느 변두리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였던 나는
자연이 놀이터 그 자체였다.
마땅히 놀만한 인공적인 것들도 없는데다가
부모님의 농사일로 늘 시간이 남아돌던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다양한 방식으로 자연을 벗삼아 모험을 즐겼다.
가끔 구슬치기나 딱지치기 정도가
그나마 사행성을 띤 문명의 혜택을 받은 놀이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보면 멀리 산능성이 넘어로
불그스레한 노을이 시야를 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땅거미 사이로 오롯히 빛나기 시작하는
달이 떠오르면 이 집 저 집에서 저녁밥 먹으라고
외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쉬운 맘을 달래며,
내일의 도박(?)과 모험을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농사도 짓고 페인트 칠을 하며 두 아들을 키우던
우리 부모님은 페인트 일이 있을때면
집에서 1시간 혹은 2시간이 넘는 거리까지 가서
뙤악볕에서 종일 학교만한 건물들을 다 칠하고 오셨다.
그러다 보면 밤 늦게나 집에 도착하기 일쑤였다.
늘 생계로 바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내성적이고 방구석을 좋아하던 형.
그리고 모험심과 호기심이 가득하던 나.
그 심리적 격차를 극복하지 못한
시간들은 나에게 외로운 날들을 선사했다.
아이들이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쪽팔리지 않게 금방 갈 것처럼 이야기하며
논두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가을 추수가 끝나고 산처럼 쌓아둔
지푸라기 볏단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본다.
노을이 숨이 거의 넘어가며 남긴
마지막 빛의 단말마는 깃털 구름떼와
어울려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짧은 빛의 향연이 끝나고
어둠과 추위가 엄습하기 시작할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는다.
나의 시야는 일순간 차단되고
의지와 표상만 남는다.
지푸라기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늦가을 벌레 우는 소리와
어디 멀리서 뻐꾸기류의 새가 일정하게 우는 소리가
빈 공간을 조금씩 매운다.
잘 귀담아 듣지 않았던
자연의 소리가 하나둘씩
달팽이관을 타고 전신으로 흐른다.
이 청승맞은 어린 고독의 시간은
사실 눈을 뜨는 한 순간을 위한 준비 운동이다.
그렇게 고요의 순간을
한 껏 느낀 아이는 두 눈을 크게 다시 뜬다.
이제는 별의 시간이다. 하루 중 가장 기다렸던 순간이다.
어둠이 내 주위를 강하게 들러붙을수록
별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저기 멀리 있는 몇 개의 가로등 불빛이
별의 등장을 가로막는 것 같아 괜시리 불편하다.
오리온 자리, 북두칠성, 게자리, 사수자리...
별자리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름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리 보이는 것도 같다.
무채색의 검은 빛으로 가득하던 하늘이
별들로 가득하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낀다.
거대한 반구에 걸렸있는 수천 수만개의
별들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인다.
아니 사실 별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노라면
가끔 알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한다.
공허의 공포.
영원의 공포.
아름다움의 공포.
별 아래 아이는 신비로움과 공포라는
호환이 안되는 묘한 감정에 사로 잡힌다.
나는 드넓은 우주에 좁쌀 같은 지구에
먼지 같은 아이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같은 사소한 것들에
목숨거는 그런 어리석은 시골의 아이.
언젠가 어린이 백과사전에서 읽었던
그 한 문장이 나를 이 곳으로 이끌었다.
내가 보는 저 별은 빛의 속도로 가도
수만 수억년이 걸리며,
저 별빛은 지금의 빛이 아니라
수천 수억 년 과거의 빛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적잖히 큰 충격을 먹었다.
늘 밤만 되면 머리 위에 떠 있는
별의 숨겨진 비밀을 뒤늦게 안것만 같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저 멀리 별을 자세히 본다.
별이 깜빡이며 나에게 우주적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저 빛은 수백만년전의 빛이다.
사소한 시골의 아이에게
저 우주가 어떤 신호를 보낼리 만무하다.
아이는 보면 볼수록 어이없이 많아지는
별의 숫자에 압도된다.
인간들은 별들이 지구를 위해 빛나는 거처럼
이야기 하지만,
사실 지구는 저 별들 사이에 존재하는 초라한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마저 알아버렸다.
신과 우주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인간만이 우주와 신에 대해
관심이 많을 뿐이다.
별들은 밤이 되니 더 환하게 빛난다.
이제 은하수와 성단무리도 슬슬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이제 이 우주와도 같은 넓고 어두운 공간에
수 많은 별과 나만이 존재한다.
영원으로의 회귀.
허망한 인생.
덧없는 시간.
존재론적 의문.
아이로서는 알 수 없는 수 많은
괴상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정말 아름다우면서 무섭다.
하지만 그 시간이 나에겐 꼭 필요했다.
해석할 수 없는 어린 감정의 소용돌이와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아득한 어둠과 멈추어진 공기.
그리고 빛나는 수만개의 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촉감과 묘한 기분이다.
그리고 지금 죽더라도 왠지 아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시간들이 삶의 집착과
허무한 생의 극복에의 의지로 작용할거라 믿었다.
추운 밤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애타게 이름을 부르는 굵은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아버지의 목소리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켜
아버지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분명 그 곳엔 어머니가 해놓은
따뜻한 밥상과 가족들의 사소한 웃음소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별을 보지 않는다.